서울 마 루
서울마루 공공개입 2022
서울마루 공공개입 2022
<광장이 아닌 마루>
광장과 마루는 다르다. 광장은 그 자체로 다양한 관계를 담기 위한 공간이라면, 마루는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야만 규정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광장은 물리적 연결이, 마루는 관계적 연결이 중요하다. 전자는 우리가 광화문 광장을 오래되지 않아 다시 고치고 있는 이유이며, 후자는 단순한 한옥의 정자에서 무한에 가까운 공간적 감동을 느끼는 이유이다.
서울마루의 이름은 마루이지만 모종의 관성에 의해 광장이길 바래진다. 하지만 이 전시관의 지붕은 최초의 계획안이 실현되지 못한 것과 별개로 모든 면이 도시에서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접근하기 어려운 지붕은 광장일 수 없고 광장이길 바래지는 공간은 주변의 공간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 긴 처마와 높은 유리 난간은 지붕에 뚫고 그 안에 들어섰을 때 전이와 위요의 공간감을 조성한다. 세종로의 보행자들과 공간적, 시각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이 공간은 오히려 중정에 가깝다.
<작은 관계들의 공간>
세종로의 공간은 일상적이지 않다. 이 의미심장한 장소에서 개인의 자리는 좁다. 육조거리에서부터 정부청사로 이어지는 정치적 의미와 유신시대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전통양식의 건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던 광화문의 조각들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는 거대한 관계성 속에 놓인다. 이 공간의 거대한 관계들은 나라는 개인보다는 민족, 국가, 역사의 관계들을 채우며 내가 감히 쉽게 점유할 수 없는 공간들을 만든다. 결과적으로 세종로에 놓인 사람들은 신체와 공간의 접촉면을 최소화하며 손님으로써 공간을 대한다.
이 장소의 마루에 누군가가 머물게 하기 위해선, 작은 공간적 관계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육조거리의 역사가 아닌 세종로를 거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대화하며, 근대화의 역사 속 덕수궁이 아닌 한옥의 담장과 우거진 숲과 새소리 즐기고, 민주화 투쟁과 성공회가 아닌 아름다운 석조건물을 만드는 돌의 풍경을 탐닉하는 공간들을 통해 작은 관계들의 공간을 만들어 내려 한다.
<팬데믹과 우리 공간의 경계>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여러 경계의 변화를 경험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초유의 개인 간의 경계에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경계라고 생각했던 집의 경계가 나를 가두는 경계로 변하는 경험을 했고 점차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질 것 만 같았던 국가 간의 경계가 다시 뚜렷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백신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서 국가 간, 대륙 간의 불평등의 차이는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흐려지고 쉽게 관계 맺었던 우리의 경계는 명확해지고 폐쇄적으로 변했다.
자가격리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주거환경은 개인의 삶과 도시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 보게 한다. 유럽 한 도시의 발코니에서 벌어졌던 플래시몹은 극도의 단절적 상황에서 관계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었다면, 이러한 가능성이 원천 차단된 우리 도시의 자가격리 모습은 아주 모범적으로 단절된 상황을 경험하게 했다.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는 도시와 연결되지 않는 우리의 주거환경은 아이러니하게도 팬데믹의 상황에 매우 유리함과 동시에 우리의 공간이 얼마나 관계 맺음에 소홀한가를 보여준다.
세종로의 풍경 또한 다름이 없다. 간단하게 지어진 커튼 월의 건물들은 그 흔한 발코니와 테라스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개인의 공간과 도시의 공간 간의 날카로운 경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팬데믹을 통과하며 명확해진 경계들의 상황에서 우리의 도시의 경계는 관계 맺음이 필요하다.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여러 경계의 변화를 경험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초유의 개인 간의 경계에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경계라고 생각했던 집의 경계가 나를 가두는 경계로 변하는 경험을 했고 점차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질 것 만 같았던 국가 간의 경계가 다시 뚜렷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백신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서 국가 간, 대륙 간의 불평등의 차이는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흐려지고 쉽게 관계 맺었던 우리의 경계는 명확해지고 폐쇄적으로 변했다.
자가격리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주거환경은 개인의 삶과 도시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 보게 한다. 유럽 한 도시의 발코니에서 벌어졌던 플래시몹은 극도의 단절적 상황에서 관계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었다면, 이러한 가능성이 원천 차단된 우리 도시의 자가격리 모습은 아주 모범적으로 단절된 상황을 경험하게 했다.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는 도시와 연결되지 않는 우리의 주거환경은 아이러니하게도 팬데믹의 상황에 매우 유리함과 동시에 우리의 공간이 얼마나 관계 맺음에 소홀한가를 보여준다.
세종로의 풍경 또한 다름이 없다. 간단하게 지어진 커튼 월의 건물들은 그 흔한 발코니와 테라스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개인의 공간과 도시의 공간 간의 날카로운 경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팬데믹을 통과하며 명확해진 경계들의 상황에서 우리의 도시의 경계는 관계 맺음이 필요하다.
<세 마루의 영역과 경계>
서울 마루에 생겨나는 정자들은 각각 주변의 공간과 관계 맺기 위한 도구이다. 세종로를 조망하는 언덕은 유리 난간의 높이를 넘어 세종로의 사람들과 직접적인 소통을 만들고, 성공회성당을 바라보는 경사는 여럿이 편히 앉아 이국적이고 풍요로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덕수궁 정원을 향하는 기단은 기울어진 바닥을 세워 정적인 장면에 대응할 안정적 환경을 만든다. 세 영역의 경계는 각각의 담장으로 분할되어 작고 독립된 공간들을 만들며 외부를 향한다. 길게 세종로와 만나는 공간은 툇마루를 두어 세종로와 직접 대면하게 하고 성공회 성당을 바라보는 공간은 넓게 퍼진 스탠드로 풍경을 받아들인다. 둥글게 말린 공간은 세종로 쪽의 긴 정자와 덕수궁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작고 풍성한 중정을 만들어 보다 가까이 풍경을 즐기도록 돕는다.
서울 마루에 생겨나는 정자들은 각각 주변의 공간과 관계 맺기 위한 도구이다. 세종로를 조망하는 언덕은 유리 난간의 높이를 넘어 세종로의 사람들과 직접적인 소통을 만들고, 성공회성당을 바라보는 경사는 여럿이 편히 앉아 이국적이고 풍요로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덕수궁 정원을 향하는 기단은 기울어진 바닥을 세워 정적인 장면에 대응할 안정적 환경을 만든다. 세 영역의 경계는 각각의 담장으로 분할되어 작고 독립된 공간들을 만들며 외부를 향한다. 길게 세종로와 만나는 공간은 툇마루를 두어 세종로와 직접 대면하게 하고 성공회 성당을 바라보는 공간은 넓게 퍼진 스탠드로 풍경을 받아들인다. 둥글게 말린 공간은 세종로 쪽의 긴 정자와 덕수궁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작고 풍성한 중정을 만들어 보다 가까이 풍경을 즐기도록 돕는다.
원본사진: 이현준, 준리포토스 / original photo: Hyun Jun Lee, JUNLEEPHOTOS